신평

2013. 7. 16. 09:11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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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때도 된거같아서 한번 갔다왔

아련아련한 신평동

13살때 내가 여기로 이사왔으니까

신평 살았던 시간보다 용호동 살았던 시간이 더 길어졌다

그래도 마치 나는 평생 여기가 내 구심점인냥..

그치만 마음속에 그리워할 곳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참 신기한게 신평동에만 가면 꼭 신평동에서 맡던 냄새가 난다

흔한 집밥 냄새, 흔한 풀냄새, 흔한 냄새들일 뿐인데 그걸 알면서도

나는 그걸 신평동 냄새라고 각인해따

그나저나 어릴때 너무나도 커보이던 것들이 어느새이렇게 작아진걸까












부산에서 48년만에 눈이 제일 많이 내렸댔나 그랬던 날 여기서 라면 상자로 눈썰매를 탔다














근데 놀이터도 운동장도 모두 주차장으로 변모해있어서 그건 좀 놀라고 아쉬웠다

놀이터 모래들도 다 사라지고 신식 놀이터로 바뀌었다 아이들의 안전을 생각해서

요즘 아이들은 놀이터에 모래가 있다는 걸 더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놀이터 모래에 물 잔뜩 부어서 다같이 흙공 만드는게 얼마나 재밌는데





















어렸을 때 친구집에 놀러간 일이 있는데

그 집 강아지 여섯마리 태어나서 신문지 위에 앉혀놨는데 애들이

움직이지도 않고 신문지위에만 있던거 하며

따조 하며 그런거만 기억나고

친구집이 어딘지 기억이 안난다









까만 토끼가 죽은 일이 있었다

오빠야랑 나는 어린 나이에 갈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를 다니며

무덤을 물색했다

그리고 집에서 10분도 채 안걸리는 화단에 몰래 토끼를 묻어주고

종교도 없으면서 어디엔가 기도도 하고 그러고 집으로 돌아갔다

새까만 아이였는데 눈이 맑았다







내가 5살이던 시절 도를 닦던(?) 신익유치원

사실 사진 왼편에 자동차가 있는 곳까지 모두 유치원 놀이터였고

모래가 깔려있었으며 신익유치원 트레이드마크인 커다란 자동차 탈것(네이밍 센스하곤..)이 있었다

자동차는 사라지고

잘 기억은 안나지만 소방관이 불났을때 타고 내려가는 봉같은거도 있었는데 그것도 사라진것같고

지금의 유치원은 하여튼 내가 기억하는 모습은 전혀 아니었다

유일한거라곤 약간 낡은 저 건물뿐








유치원 옥상

새동네랑 낙동강

한번 새신평,새동네라고 이름붙여지면

10년이 지나도 새신평,새동네다

1989년에 만들어진 프랑스 문학사 책도 "새로운 프랑스 문학사" 라고 당당하게 이름달고 있는걸

새롭다는건 늘 상대적인 거니깐 다 인정할 만 함

나도 10년넘게 늘 새로운 기묘 하고싶당












저기 작게 보이는 지하천 1호선은 하단을 지나 신평역을 향하면서 지상철이 잠깐 된다

하단 즈음에서는 사람들이 대체로 다 내려서 신평에 올땐 고요하다

어릴 때는 엄마가 할머니집에 가자고 손을 잡으면 다른것보다

신평에서 온천장까지 가는 거리동안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어서 심심하고 지루했다

그 때는 다리가 짧고 키도 작고 그래서 엄마가 지하철 의자에 앉혀놓으면 내 혼자 힘으로는 바닥에 발이 닿을 수 없었다

옆에있는 온갖 철봉이니 모서리니를 다 잡고 이렇게 저렇게 해서야 툭 떨어지는 정도

그랬던 나였는데 앉혀놓으면 의자에 앉아있기만 하는 나였는데

세상 모든 일은 사하구 내에서만 일어나는 줄 알았던것같다 남포동도 내게는 너무 멀었는데

지금 이렇게나 커졌다

신평역에서 열차를 기다리고있으면 늘 나오는 클래식이 정겨웠다





















하얀 트럭이 주차되있는 옆구멍이 우리집 가는 길이다 902호였다

3층,4층 그리고 19층에 친구들이 살았고 옆 라인에도 친구가 살았다

옆 라인 친구집에서는 어머니분들이 안계실 때 둘이서 짜파게티를 해먹겠다고 설치다가

라면국물같이 물에다가 짜장가루스프를 부어버려따 

짜파게티를 먹으면서 내내 "엄마가 해주는거랑 좀 다르다" 했던 기억이

 







지하철에서부터 시작해서 아파트 꼭대기까지 올려주는 마을버스

180원인가 그러지 않았던가 내가 내야할 돈이

토요일에 학교 마칠 시간에 진짜 버스 줄도 길고 한번 타려면 완전 꽉꽉 끼어서 타고 올려오는게 힘들어따

그래서 토요일에는 친구들하고 집까지 걸어올라가거나 카풀 제도가 잠시 활성화 되있을때

단체카풀 해서 트럭 뒤에 타보고 그랬다. 트럭 뒤에 짐칸에 열댓명이서 타보는건 재밌는 일이었다





















탑마트는 수목돌풍

여기 롯데리아에서 양념감자 엄청 사먹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교통사고가 날 뻔 한 장소































신익1차에서 2차로 , 2차에서 1차로 넘나들수있는 비상계단인데

.....부..불법 건축물이니 안전사고에 유의하라고 저렇게 친절하게 써져있었구나..^^*...2008년부터..

추락주의 표지판은 옛날부터 있었던거같다 

여기 참 오지게 많이 다녔는데










꼭 판박이 스티커 저렇게 간판이나 글자 위에 붙이는 애들 있다

구지 거기





나도 해봤다

판박이 풍선껌 있을때..

그래고 나 상가 천장에다가 그 끈적거리고 기분나쁜 이상한거

던져서 붙어있게는 안했다





















내 출신의 명문 학원

이라기보다 나 체르니 100번 치다가 그만뒀다

왼손악보를 보는게 너무 어려워서 늘 도미솔 레파라를 작게 적어놨다

이정화 선생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피아노 선생님이 혼냈다

피아노학원선생님들은 늘 갸냘프고 긴 생머리에 얇은 팔찌를 하고있었다

커피 머그잔을 들고다니면서 모나미 볼펜으로 피아노 흰건반을 딱 딱 박자맞춰 쳤다

그바람에 흰 건반의 선생님 쪽, 가장 우측 자리는 늘 모나미 볼펜자국이 나 있었다



어쨌든 나는 지금도 왼손악보를 볼 줄 모르고 샵이나 플랫 2개 이상 붙어있는 악보보면

갑자기 갑갑함이 밀려온다 나는 그래서 음악하는 여자가 되지 몬해따

















1차에서는 106동에 살았고 2차에서는 206동에 살았다

1차에서는 705호였고 (누군가의 생일하고 일치한다고 좋아했던 기억이)

2차에서는 902호. 엘리베이터가 고장나도 영 걷기 불가능한 층수는 아니어서 좋았다

이런걸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니 엘리베이터가 고장난 일이 많았었나.....왜그렇지







8학군 머시기 학원은 없어졌나보다

연필과 크레용은 내가 어릴때부터 있었다 20년이 다되가거나 지났거나 그럴거시야








하남초 나와서 종이와 연필 모르면 진짜 간첩일수도있다

근데 옆에 낙원청과는 모르겠다

여기도 예전하고는 먼가 비슷하면서 많이 달라져있었음

떡꼬지를 사먹던 가게가 아직 있는지 없는지는 확인을 못하고왔다

피카츄 돈가스도 가끔 먹었다 나는 돼지였다

과거형이길











이길따라 가면 가락타운에 새로생긴(그때기준) 유치원에 들어가서 놀다가 유치원선생님들한테 혼났다

우리 초딩들이 와서 노는 바람에 유치원애들이 놀이터에서 못논다 그런이유였다

그땐 그런게 어딨노 했는데 지금생각하니 왜 남의 유치원 들어가서 구지 놀아야 했을까 유치원생들이

우리 무서워서 못 놀았을 것 같기도 하다

지금 생각해야 이해가 되지 그 나이에는 이해를 못했다

같이놀면되지

봄에 벚꽃피는 길이 이 길이던가? 20살이 넘어서 만난 친구가 가락타운에 야구선수 산다그럤는데

야구를 잘 몰라서 선수 이름도 기억이 안난다

여튼 토요일에 자주 가락타운엘 갔다 친구 생일파티는 참 공교롭게도 매주 토요일마다 쉬지도 않고 있었다












깜짝 깜짝 놀란건

구석구석에 내가 기억하는 것들이

내 기억속에서보다 훨씬 더 작아져있었다는거

물론 내가 커져서 그런게 당연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냥 세상이 작아진거같은 기분이다


친구랑 슬러시 하나사서 강변에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 했던게 몇 년이 됐다

친구도 나도 서로 할 일에 시간이 안맞아 제대로 못만나고 있다

이름이 특이해서 내가 기억하는 친구들은 당연히 나를 기억못할 걸 알기에

페이스북에서 보고도 감히 친구신청도 못했다


아 얘는 잘 살고 있구나

아 쟤는 이렇게 됐구나

그 때는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그 때는 자라면서 지금은 하지 못할 고민을 하게 될 거란것도 몰랐고

그냥 그날 그날, 사루비아 따먹고 땅따먹기 하고 

운동회할때 릴레이달리기선수로 날 지목하는게 그렇게 싫었고

받아쓰기 누구는 100점이고 누구는 몇점이고 그런거 하고

(당시 나는 승부욕이 거의 제로에 가까워 이런것들에 민감하지 않았다)


그치만 지금은 기억조차 안나는 그 때 나름대로의 고민이 분명 있었겠지

친구관계라던가 뭐 이것저것. (딱히 없었을거같다 솔직히)


지금 생각하면 이 때가 과거고 추억이고 돌이킬 수 없는 옛날이지만

또 미래에서 생각하면 지금이 과거고 추억이고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될 것이다

지금 그래선 안되지만 그래도 아이라고 생각하고 이 때처럼, 하루하루 시작이길


미래에서 바라본 지금의 나에 대해서

추억은 남되 후회는 없었으면 좋겠는 것이다





언제나 먼곳만을 바라고 추억하고 그리기보다는

가까운 지금부터 소중히 여겨서 늘 언제나 추억을 만드는 동시에 그 속에 살아가고싶담

뭐든지 멀리있지 않다. 행복이든 뭐든 늘 언제나 우리 곁에 있을 수 밖에 없는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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